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온양 방씨 (문단 편집) === 상세 === [[신라]] [[경애왕]] 3년([[926년]]) [[견훤]]의 [[후백제]]군이 신라를 침략하여 [[서라벌]]은 물론, 방씨의 본관이던 상주 역시 큰 화를 입게 된다. ~~견훤의 고향이 상주인 것은 넘어가자[* 당시 행정구역 기준이다.]~~ 수도와 상주에 살던 방씨들이 이 때 멸문에 가까운 화를 당했고, 가까스로 당시 10살이던 방운(方雲)은 탈출하여 살아남았다. 유랑생활을 하다가 17세에 [[왕건]]의 휘하로 들어가 종군하여 [[고려]] 건국에 공을 세우게 된다. [[광종(고려)|광종]] 14년([[963년]])에 좌복야[* 지금으로 따지자면 [[대한민국 부총리|부총리]], [[조선시대]]로 따지면 좌찬성 정도 된다.] 에 제수되는데에 이어 [[성종(고려)|성종]] 13년([[992년]]) 온수군(溫水君)에 봉해지며 [[온양]], [[아산]], [[신창]]의 세 고을을 [[식읍]]으로 하사 받았고, 방씨가 사는 산을 배방산(拜方山, 방씨를 우러러보라)이라 명명했다.[* 아마도 국가 원로로서 꽤 대우를 받았던듯 하다.] 이렇게 되면서 본관이 상주에서 온양으로 옮겨졌다. [[고려]]말 온천부원군 밀직원직학사 국서 방언휘가 재택을 보호하기 위하여 배방산성 성곽을 축조하였고 그 내부 동북변에는 온수군의 유택이 녹봉되었다. 이렇게 중시조의 고생과 노력 덕분에 후손들은 고려왕조 내내 호족으로 분류되어 잘 살 수 있었다. [[조선시대]]에 들어 방씨는 또 한번 위기를 맞게 된다. 17세손인 방강(方綱)은 [[김종서(조선)|김종서]]의 손녀 [[순천 김씨]]과 혼인하였는데, [[세조(조선)|세조]]가 [[계유정난]] 때 그 일족이 [[단종(조선)|단종]] 옹호세력인 김종서 편에서 협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방씨를 숭배한다고 명명한 배방산을 방씨를 증오한다 하여 숭배할 배(拜)자를 배척한다는 배(排)자로 고치고 배방산(排方山)이라 개칭토록 하였으며 방씨제위의 관급등분을 강등시키고 온수군 이하 기타 누대에 걸친 묘역과 산성 저택들을 파괴하고 묘 비석물들을 철페하고 일족들을 멸하기까지도 하였다. 아마도 이런 이유로 조선조에서 유명한 방씨는 찾아보기가 힘든 듯 하다. 그 후 [[숙종(조선)|숙종]]조에 온수군의 후손인 양무원종 3등공신 사과 방최일이 산성의 명칭을 다시 배방산성으로 돌려달라고 상소하였으나 왕은 선대왕께서 정한 것을 함부로 고치지 못하지만 단지 排方의 方자를 芳(꽃다울 방) 자로 인준하라는 답변을 얻는데 그쳤다. 그 후 지금까지 지명이 이어지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